Ⅰ.
치매 : 고립과 배제의 공포 너머 연결되는 삶을 찾아
사람이 나이 들고 늙어 감은 생물로서 필연적 숙명이다. 그렇지만 한 인간이 노년을 맞는 방식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에 따라 다르다. 노년은 생애 주기 한 시점의 정태적 반영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친 그의 삶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층위의 역동적 상호작용 과정의 연장이자 결말이기 때문이다(보부아르, 2002: 17-23).
공자(孔子)는 나이 칠십 들어 하고자 하는 바를 마음이 가는 데에 맡겨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노인의 모습을 말한다. 이는 십대에 공부에 뜻을 세우고, 삼십 무렵 세상에서 자기 몫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며, 사십 들어서는 삶의 방향이 분명해져 세속 이끗에 흔들리지 않고, 오십 줄에 생애 과업을 깨달으며, 육십 대에 인간에 대한 넓은 이해와 관용을 체득함을 전제로 한 것이다.1) 키케로(M. Cicero) 또한 자신의 권리와 영역을 지키면서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노년에 대한 존경을 언급하면서 그 존경은 백발이나 주름살로 얻는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 명예롭게 보낸 세월의 결실임을 강조한다(키케로, 2005: 43-87). 공자나 키케로가 제시한 노인상은 시간의 고금과 지역의 동서를 떠나 많은 사람이 바라는 이상적인 노인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지만 노인의 실제 삶은 어느 시대나 계급과 빈부 차이로, 성별로 인해, 도시와 농촌 등 주거지역의 다름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다른 모습을 갖는다. 노년의 경험 역시 개개인의 경제적 상태, 신체적 건강, 사회 적응 능력의 격차로 아주 판이하다(테인, 2012: 11-52). 특히 소비사회의 팽창과 풍요의 신화가 지배하는 이 시대 노인은 건강과 명석한 이성을 보존하고 있다고 해도 이윤을 낳지 못하는 수치스러운 비생산적 인구층으로 기호화되어 남은 생애를 인수 거절당한 폐품처럼 살기도 한다. 생애주기 과정으로서 노후가 평안하고 당당하지 못하고 살아남기 위한 고투의 연속이다. 소득의 빈곤, 사회적 역할 배제, 교제 범위의 축소, 극심한 고독과 권태, 인간으로서 존엄성 감소와 상실,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라는 재앙에 시달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도할 수 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여 노인은 인간 본래의 자연스러운 욕망, 감정, 요구를 드러내는 것마저도 빈축을 사며 그들의 사랑과 질투는 추하거나 우스꽝스럽고, 성행위는 혐오스러우며, 폭력은 가소로운 것으로 여겨진다(보부아르, 2002: 755-762).
노후에 겪는 이와 같은 어려움에 더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지 못하고 질병에 시달리는 노인의 생활 애로는 더욱 클 것이라는 것은 쉽게 헤아릴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사회적 행위의 전제가 되는 기억, 언어, 의사소통 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되거나 상실하여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치매 노인의 곤경은 명약관화이다. 2023년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18.4%를 차지하는 높은 고령화율을 반영하여 우리나라 치매 노인의 수도 빠르게 늘어난다. 2022년 기준 96만 명으로 추정하는 치매 노인은 2030년에는 142만 명, 2050년에는 302만 명에 이를 것으로 내다본다. 치매 유병률은 65세 이상 노인인구의 10.4%로 이미 노인 10명당 1명꼴로 치매임을 알려준다(중앙치매센터, 2023: 8-9). 치매 유형별로는 알츠하이머 치매(76.04%), 혈관성 치매(8.57%), 기타 치매(15.37%) 순이다. 치매 인구가 늘어나면서 연령이 많은 사람 가운데서는 치매를 암, 뇌졸중, 당뇨병보다 더 두려운 질병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자아 상실에 대한 공포감, 가족에 대한 돌봄 부담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보건복지부⋅국립중앙의료원, 2022: 17-23).
그런데 전체 가구에서 65세 이상 고령자 가구가 25.1%이고, 그 가운데 독거노인 가구는 36.3%, 노인부부 가구가 35.3%를 차지하는 등 가족 거주 양식이 변화하고 부양의식이 저하함으로써 치매 노인을 돌볼 수 있는 역량 또한 약해진 상태다(통계청, 2023). 치매에 대한 공포, 가족의 돌봄 부담과 더불어 의료비(건강보험 본인 부담금)와 노인장기요양 비용(시설급여와 재가급여), 국가의 치매관리 비용 등 사회적⋅경제적 부담도 크게 늘어난다. 실제 2022년 국가의 치매관리 비용은 20조 원을 넘어선다. 이는 GDP의 0.91%이며, 2040년에는 63조 원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보건복지부⋅중앙치매센터, 2022: 9-13). 치매 노인과 가정의 경제적⋅정서적⋅육체적 돌봄 부담 완화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커짐에 따라 2007년 이후 국가의 공적 개입과 지원 정책 마련이 가시화한다. 그에 따라 치매 조기검진, 치매 환자 맞춤형 사례관리, 치매가족 부담 경감, 치매 인식개선, 치매 관리 전달체계 효율화, 치매관리 공급 인프라 확대 및 전문화, 치매환자 지역사회 거주 및 돌봄 체제 수립이 상당한 수준으로 진전한다(보건복지부, 2020: 12).
국가와 시민사회의 치매 관련 정책, 제도, 서비스 마련과 걸음을 맞추어 정책 실행의 효과와 효율성을 높이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는 학문 연구 또한 진전한다. 인지능력 저하의 원인과 유형, 치매로 인한 문제 행동과 대응 방법, 돌보는 가족의 부담이나 스트레스 완화에 관한 연구가 상당량 축적된다. 인지 변화에 관한 이해는 이른바 배회나 망상 같은 치매 노인의 문제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가족 돌봄의 신체적⋅정서적 부담의 패턴에 대응하는 사회적 돌봄 전략 마련에 기여한다(고숙자 외, 2016; 김경래 외, 2020). 그럼에도 이와 같은 연구는 치매 문제를 주로 뇌기질 장애로 단순하게 환원하는 것이라는 한계를 지적받는다. 그래서 치매 관련 연구는 치매인 본인과 그 가족의 정서적 갈등과 고민, 치매로 부정되는 인간성과 상실감, 치매인의 주체적 삶을 영위할 권리 등을 담은 사회심리와 사회복지 관점의 연구, 나아가 인권 차원의 논의로 확장된다(최희경, 2017; 정종민, 2020; 정종민; 2021). 그런데 생의학 기반의 연구이든 사회심리, 사회복지, 인권 관점의 연구이든 대부분은 ‘치매 당사자 본인의 문제 상황과 거기에서 생겨난 욕구’에 연원을 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바꿔 말해 치매인의 주관적 체험과 당사자 욕구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치매인 밖의 가족, 보건⋅의료 정책 관료, 의료와 간호 전문가, 장기요양 돌봄 인력 등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山田富秋 編. 2004: 244-245).
사정이 여기에 이른 것은 치매 판정을 받기만 하면 치매 진행 상태와 무관하게 그 사람을 바로 사리 분별하지 못하고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환자로 여기는 치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낙인 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치매인의 감성과 사회생활 기술은 곧바로 상실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할 수 없는 기능과 역할’만을 부각하기 때문에 사람대접받고자 하는 치매인의 절실한 이의제기에 귀 기울이고, 인간으로서 온당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려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는 것은 쉽지 않다. 바로 치매와 연관한 연구, 정책과 제도, 서비스 마련의 실천 구상이 인간 존재에 대한 진정성과 문제의 실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치매 당사자의 삶의 조건과 욕구에 근거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Hughes, 2006: 15-35).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전제로 이 글은 첫째, 치매 당사자는 자신의 ‘생애주기 과정의 대전환으로서 치매’라는 삶의 조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일상생활의 여러 곤혹스러운 경험에 주관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확인한다. 둘째, 치매인의 심신 상태 변화와 감정의 갈등은 자신을 돌보는 사람과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또한 역으로 무슨 작용을 받는지를 알아본다. 셋째, 치매를 ‘뇌의 인지기능 저하나 손상으로 인한 일상생활 장애이자 사회관계 장애’로 접근한다. 이는 치매인을 공포감, 굴욕감, 수치심 안에 고립시키고 배제하는 것을 묵인하거나 심지어 정당화하는 생의학적 관점을 넘어서 다른 사람과 연결된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돌봄 체제의 내용을 제안하려는 것이다.
치매 당사자의 주관적 경험과 내면의 감정에 담긴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이 글은 내러티브 분석, 그 가운데서도 ‘치매인 자서전의 서사 분석’에 의거한다. 분석 대상 자료는 ‘노령기 들어 치매를 갖게 된 사람의 자서전(하세가와, 2021)’과 ‘장년기에 조발성 치매를 진단받고 노령기에 이른 사람의 자서전(McGowin, 1993; 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웬디 미첼, 2022)’를 함께 살핀다. 분석은 우선 생애주기의 한 시점에서 삶의 근본적 전환이 된 치매 진단 경험에 대한 의미를 들여다본다. 다음으로, 치매인을 부정적이고 병리적 존재로 구성하는 것은 누구이며, 그러한 생의학적 규정에 대한 치매인의 수용과 거부의 태도는 어떤 모습인지를 살핀다. 이어서, 치매와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에서 삶을 절망하게 하는 요인, 그럼에도 삶을 유지하도록 버티게 하는 근원적 동력을 알아본다. 나아가 치매인 개인의 경험, 감각, 생각, 감정, 에피소드의 주관적 서술과 의미 분석을 다시 패턴화를 통해 상호주관적 언술 체계로 고양하는 것이 이 글의 연구 방법이자 서술 형식이 된다.
Ⅱ.
치매 정책의 현황과 한계
이 장에서는 치매인 당사자의 욕구에 근거한 정책 수립의 전제 작업으로 「치매관리법」 제정(2011년)과 시행(2012년)을 전후한 치매 관련 정책, 전달체계, 사회서비스 등의 변화 과정을 살핀다. 나아가 치매 정책 마련으로 치매인과 그 가족이 얻게 된 실제 효과는 무엇이며, 정책 운용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한계와 과제는 어떤 것인지를 살핀다.
1.
치매 관련 주요 정책의 제도화 및 변화 과정 개관
생애주기의 노년기에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지속하는 데 활용하는 기억력의 급격한 쇠퇴나 상실, 인지기능과 의사소통 능력의 쇠약, 자아 정체성 혼란 등을 예전에는 ‘노망(老妄)’이나 ‘망령(妄靈)’으로 지칭한다. 노망이나 망령은 병이 아니라 노인에게 흔하고 불가피한 징후로 여겨져 대부분 가족이나 친척이 집에서 돌보면서 지역사회 안에서 함께 사는 것이 일상이다(박완서, 1996). 노망이나 망령은 1990년대 들어서부터 노화 과정의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병인에 의한 ‘치매(dementia)’라는 질환으로 구성되어 의학적 진단과 예방, 치료, 격리 요양의 대상으로 바뀐다(엄미옥, 2018: 291-294).
의학에서 치매는 성년기 이후에 외상이나 감염증, 혈관 장애 같은 다양한 질병을 원인으로 뇌의 신경세포가 손상되어 기억⋅언어⋅지각⋅사고 등 인지 관련 기능이 저하하여 일상생활에서 지속적으로 지장을 받는 상태를 말한다. 치매를 의학적으로 정의하는 중요 기준인 WHO(세계보건기구)의 ‘국제질병분류 제10차 개정판(ICD-10)’ 역시 “치매는 대개 만성 또는 진행성 뇌 질환으로 인해 생기며 기억⋅사고⋅지남력⋅이해⋅계산⋅학습⋅언어⋅판단 등 다양한 고차 뇌 기능 장애가 발생하는 증후군”으로 정의한다(하세가와, 2021: 45-47). 그런데 2013년 5월 미국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는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편람 DSM-5』를 펴내고 ‘치매’라는 말을 폐기한다. 대신에 ‘신경인지장애(neurocognitive disorders)’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한다. 나아가 신경인지장애를 다시 ‘경도 신경인지장애(mild neurocognitive disorders)’와 ‘주요 신경인지장애(major mild neurocognitive disorders)’로 분류한다(APA, 2021: 645-702). 일본 ‘정신신경학회’는 이 가운데 ‘주요 신경인지장애’를 ‘인지증(認知症)’이라고 번역하고 알츠하이머형 인지증, 뇌혈관성 인지증, 루이소체 인지증, 전두측두엽 인지증 등으로 유형화한다. 일본이 일상생활은 물론 의학, 법, 행정 용어로 오래 사용해 온 ‘치매’를 2004년부터 ‘인지증’이라 부르는 것은 치매(癡呆)에 담긴 바보⋅멍청이라는 모멸적 낙인을 줄이려는 사회적 고민의 소산이기도 하다(하세가와, 2021: 147-150),
‘인지증’은 주로 뇌의 인지기능 장애와 그에 수반한 신체기능 저하 혹은 행동 이상 현상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반면 치매인의 문제는 인지기능 장애뿐만 아니라 거기서 생겨난 일상생활 수행의 어려움, 의사소통과 사회적 관계 유지의 곤란함 등을 포괄한다. 따라서 이 글은 인지 장애, 일상생활 장애, 사회관계 장애를 별개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적 문제로 바라보는 ‘치매’가 현상을 포착하고 포괄하는 데 더 나은 개념이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인지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는 추세를 따르지 않고 치매를 그대로 쓴다. 아울러 이 글에서 치매의 개념 정의와 논구 범위는 별도로 조작적 정의를 내리지 않는 한 우리나라 「치매관리법」에서 제시한 것을 준용한다(국가법령정보센터, 2024). 현행 「치매관리법」은 치매를 “퇴행성 뇌질환 또는 뇌혈관계 질환 등으로 인하여 기억력, 언어능력, 지남력(指南力), 판단력 및 수행능력 등의 기능이 저하됨으로써 일상생활에서 지장을 초래하는 후천적인 다발성 장애”라고 정의한다(제2조 1항). 나아가 「치매관리법」은 “치매의 예방, 치매 환자에 대한 보호와 지원 및 치매 퇴치를 위한 연구 등에 관한 정책을 종합적으로 수립⋅시행함으로써 치매로 인한 개인적 고통과 피해 및 사회적 부담을 줄이고 국민건강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치매 관련 법제와 정책 실행을 명시한다(제1조).
그러면 「치매관리법」 제정과 시행을 전후해서 치매인과 그 가족을 돌보고 지원하는 치매 관련 정책, 전달체계, 사회서비스 등이 얻어낸 성과는 무엇이고, 그 운용 한계는 어떤 것인지를 개관해 보자. 치매인과 그 가족의 돌봄 부담을 나누고 지역사회 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법령과 정책 수립, 전달체계 구축, 서비스 제공이 내실을 갖춘 것은 2007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노인복지법」에 치매에 대한 국가 책임을 규정하고 치매 연구와 관리사업, 치매 상담센터 설치와 운영을 명기한다. 2008년에는 ‘제1차 치매종합관리대책(2008년-2012년)’을 수립하여 치매 조기발견과 예방, 체계적 치료 및 관리, 치매 관리 인프라 구축, 치매 환자 부담 경감과 부정적 인식 개선 활동을 시작한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9: 10). 2011년 8월 치매 관련 정책 수립과 서비스 제공의 법적 근거가 되는 「치매관리법」을 제정하여, 2012년 2월 시행한다. 이 법에 따라 ‘제2차 국가치매관리종합계획(2013년-2015년)’, ‘제3차 치매관리종합계획(2016년- 2020년)’을 추진한다. 특히 2017년에는 ‘치매 국가책임제’를 도입하여 치매 환자의 장기요양 서비스 확대, 치매 환자 의료비 및 요양비 부담 완화, 맞춤형 사례관리 지원이 가시화한다. 현재 ‘제4차 치매관리종합계획(2021년-2025년)’ 정책은 무엇보다 치매 환자와 가족이 지역사회의 자원을 연계해서 요양시설 보호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자신이 살던 곳에서 계속 거주하는 사회 실현에 목표를 둔다. 정책 실행의 한 축은 치매정책 내실화를 위한 ‘전문화된 치매 관리와 돌봄’이고 또 다른 축은 치매 관련 인프라의 연계 체계 마련과 기존 제도 개선이다(보건복지부, 2020: 1-10; 보건복지부, 2023: 3-4).
치매 정책의 추진을 통해 거둔 두드러진 성과로 핵심적 전달체계 구축을 들 수 있다. 치매 정책의 국가단위 사업 수행 기관으로서 중앙치매센터, 17개 시도 광역치매센터, 256개 시군구 치매안심센터 설치가 그것이다(보건복지부, 2023: 5-12). 특히 치매안심센터는 지역 주민의 삶과 밀착한 곳에서 치매 노인과 그 가족의 문제 상담, 검진, 관리, 서비스 연결을 지원하는 인프라이다. 다음으로, 치매 환자와 그 가족이 요양시설 서비스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지역사회 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자원을 연계하는 ‘치매안심 마을’을 꾸리기 시작해 641여 곳을 운영한다. 동시에 지역사회 구성원의 치매에 대한 부정적 인식 개선에 나설 인력인 ‘치매 파트너’ 125만여 명을 확보한다. 나아가 치매 관련 장기요양서비스의 급여 범위를 확대하여 의료서비스 접근을 강화한다. 201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에 ‘인지 지원등급’을 도입해서 신체기능이 양호한 치매인도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 아울러 치매 환자의 의료비를 경감하고, 가정에서 돌보기 힘든 중증 치매 환자를 전문적으로 치료하고 관리하기 위해 2017년 이후 공립요양병원에 치매 전문병동 57개소를 마련한다(보건복지부, 2020: 5-11; 보건복지부⋅국립중앙의료원, 2022: 58-70).
2.
치매 정책 실행의 한계 및 과제
치매인과 그 가족이 경험하는 생활상의 여러 문제를 국가가 중심이 되어 완화하거나 사회화하려는 치매 관리 인프라 확대 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또한 치매 환자의 장기요양 급여 적용을 확대해 치매 치료나 요양에 들어가는 비용 부담을 줄인 점 역시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치매인의 지역사회 내 삶의 유지를 위한 일상생활 지원과 의료⋅요양 등의 돌봄 서비스를 서로 통합 연계해서 복합적 욕구에 충분하게 대응하는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나아가 치매인과 그 가족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전달체계가 공급자 중심으로 꾸려져 그 질적 수준이 치매인과 그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많다(보건복지부, 2020: 8-10).
이 절에서는 2007년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온 치매 정책에 대한 평가를 개관하고 정책 실행 과정에서 드러난 한계점과 개선 과제를 살핀다. 논점 정리의 편의를 위해 치매인과 가족의 생활지원 서비스 욕구에 대한 충족 미흡, 서비스 전달 인프라의 공급자 중심성, 치매관련 서비스의 질적 수준 미달이라는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정리한다(보건복지부, 2020: 15-60;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22: 6-73).
첫째, 치매인 본인과 가족의 돌봄 부담을 덜기 위해 제공되는 생활지원 서비스에 대한 만족도가 낮다. 치매인과 가족 돌봄 지원을 위해 장기요양의 인지 지원등급 등을 확대하지만 실제 이용 가능한 서비스는 ‘주간⋅야간보호 서비스’ ‘치매안심센터 쉼터 서비스’ 정도이다. 특히 치매인과 그 가족은 주간⋅야간 보호기관 서비스가 중증도 구분 없이 제공되는 것에 불만이 크다. 치매인을 돌보는 가족에 대한 지원 서비스 역시 내실이 탄탄하지 않다. 그로 인해 ‘치매가족 휴가 서비스’가 제도로는 마련되어 있지만 실제 이용 실적은 저조하다. 치매 부부 가족과 같은 취약 가구에 대한 맞춤 서비스도 제한적이고, 치매인 가족의 자조모임, 보호자 상담, 돌봄 교실의 질적 수준이 낮아 제도 운영의 실효성에 의문이 크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치매 환자의 중증도와 욕구에 근거해 의료 서비스와 돌봄 서비스를 통합⋅연계해서 제공하는 전달체계의 효율성 강화가 정책 과제로 설정된다.
둘째, 인프라 구축의 공급자 중심성이다. 치매인과 그 가족을 위한 의료⋅요양 인프라를 확대한다고 하지만 치매인을 전문적으로 치료하고 돌보는 ‘치매안심병원’이나 ‘치매 전담 장기요양시설’의 돌봄 수용 능력은 크게 떨어진다. 치매안심센터 또한 교통 불편 등 접근성 문제 등으로 당사자의 욕구와 필요에 충분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점이 드러난다. 게다가 치매인의 소득 수준, 거주 상황, 동반 질환 등에 따른 차별화된 치매 관리 서비스 역시 부족한 점도 확인된다. 그래서 중앙치매센터, 광역치매센터, 치매안심센터와 지역사회 보건의료 및 요양, 복지서비스 제공 기관을 연계하고 상호 협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치매관리 수행 기관의 역할 재정립이 정책 과제로 부상한다. 대체로 치매관리 사업 수행 기관이 치매진단, 치료, 보호와 같은 전문 세부 영역을 모두 떠맡기보다는 지역사회 내 다양한 유관기관의 조율자(coordinator) 역할을 제시한다.
셋째, 치매인의 일상생활 수행능력 유지와 치매 증상 악화를 막기 위해 제공되는 진단, 치료, 돌봄 서비스의 질에 대한 만족도가 낮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표준화된 진료 지침의 부재, 치매 전문병동 수가의 정액제 적용에 따른 양질의 의료서비스 제공의 한계 등에서 파생한 문제로 보인다. 이와 같은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정책 개선 과제로 지역사회 치매 서비스 전달의 중심인 치매안심센터에 배치된 간호사, 사회복지사, 작업치료사, 임상심리사 등이 연계, 협력하여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례관리팀을 구성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있다.
Ⅲ.
치매 정책 전환의 필요성과 새로운 정책 구상의 방법론적 시각
치매인과 그 가족이 경험하는 생활상의 문제를 국가가 중심이 되어 지원하거나 사회화하려는 현행 치매 정책은 그 실효적 성과의 한편에 운용 과정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번 장에서는 현행 치매 정책의 제약은 어디에서 연원하며, 치매 정책의 핵심 문제로서 치매 당사자의 욕구 배제와 거기에 담긴 사상적 의미는 어떤 것이고, 치매인 당사자주의를 옹호하고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 도출에 활용할 수 있는 방법론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본다.
1.
현행 치매 정책의 당사자 배제 문제와 그 사상적 의미
현재 시행 중인 치매 정책은 ‘제4차 치매관리 종합계획(’21- ‘25)’에 기반을 두고 마련한 것이다. ‘제4차 치매관리 종합계획’은 치매 정책 수립과 실행의 기반이 되는 정확한 데이터 확보를 위한 다섯 가지 핵심 과제를 설정한다. 첫째, 건강보험⋅장기요양보험 등 치매 관련 자료 연계를 통한 치매 종합정보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여 치매 환자 개인별 맞춤 서비스를 한다. 둘째, 일반노인⋅치매 고위험군⋅치매 환자 등 치매 관련 코호트 자료를 체계화하여 통합 관리한다. 셋째, 치매 임상정보 및 생체 자원 정보를 통합하는 플랫폼을 구축해서 관리를 일원화한다. 넷째, 치매 환자의 인지능력 강화를 위한 디지털 치료 기기를 개발한다. 다섯째,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ies) 기술을 활용해 치매인의 주거 안전을 강화한다(보건복지부, 2020: 38-42).
그러면 치매 관련 정책의 효과성과 효율성을 담보하는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한 실제 메커니즘은 현재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살펴보자. 치매 정책을 추진하는 중심 기관인 ‘중앙치매센터’는 매년 치매역학조사와 치매실태조사를 연계한 ‘고령자인지건강(치매)실태조사’, 국민건강보험공단 및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 통계청 각종 통계 등을 수집하고 가공해서 치매 관련 정보의 종합 보고서인 『대한민국 치매 현황』을 발간한다. 보고서는 치매 관련 통계와 자료를 분석해서 상호 연관성에 따라 치매환자 현황, 치매환자 비용 발생 현황, 치매 관련 서비스 현황, 치매 관련 인프라 현황 등 4개의 큰 범주와 세부 항목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영역인 치매 환자 현황은 중앙치매센터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고령자인지건강(치매)실태조사,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치매 환자 의료서비스 수진 자료, 통계청의 장래인구 추계, 사망 원인 통계, 주민등록 연앙 인구 자료 등을 활용한다. 특히 보건복지부는 고령자인지건강(치매)실태조사 자료를 토대로 치매인의 성별, 연령대별, 지역별 분포와 유병률, 발병 관련 요인, 치매 환자 가족의 돌봄 부담을 분석한다. 두 번째 영역인 치매환자 비용 발생 현황은 고령자인지건강(치매)실태조사, 전 국민 치매 인식도 조사,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치매환자 의료서비스 수진 자료, 치매 치료제 처방 내역, 치매 치료 관리비 지급 내역, 치매 환자 장기요양보험 이용 내역, 치매안심 통합관리 시스템의 치매 상담 자료,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의 노인 학대 현황, 경찰청의 실종 치매 노인 통계 등을 이용해 산출한다. 세 번째 영역인 치매 관련 서비스 현황은 중앙치매센터의 자원 현황, 보건복지부의 요양기관 현황, 사회복지시설 정보 시스템, 노인복지시설 현황, 감사원의 노인의료 자원사업 추진 실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장기요양 통계연보 등을 활용한 데이터이다. 네 번째 영역인 치매 관련 인프라 현황은 주로 치매안심통합관리 시스템 자료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국민건강 검진사업 자료, 치매 환자 치매 치료제 처방 내역, 노인장기요양보험 급여 이용 내역 등을 활용한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9: 31-41; 보건복지부⋅국립중앙의료원, 2022).
그런데, 치매 정책 수립의 기반이 되는 데이터나 통계 자료 확보의 메커니즘이 정책 실행의 효과성과 효율성을 높이면서 신뢰도나 타당도를 담보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아가, 현행 치매 정책이 제도와 서비스로 시행되고 전달되는 과정에서 제약이나 한계가 드러난다면 그 간극의 연원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 기반을 제공하는 학문 영역이 사회정책학(Social Policy)이다. 사회정책학은 해당 사회의 정책은 일반적으로 정책 대상이 되는 문제의 인식, 정책 과제 설정, 정책 결정, 정책 시행, 정책 평가 과정을 거쳐 도출되는 것임을 확인해 준다. 사회정책 영역 가운데 최근 그 중요성이 더해지는 분야가 정책 평가이다(Greener, 2014: 5-28). 정책 평가에 대한 관심이 커진 배경에는 정책 설정과 연구 결과에 대한 책임성, 정책 실행에서 증거기반 확보 여부의 중요성, 공공 정책의 효과에 대한 사회적 요청 등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日本社會福祉學會 編, 2014: 626-627).
사회정책, 특히 사회복지 관련 정책 설정을 이끌고 평가함에 티트머스(R. Titmus)의 ‘욕구 연구’와 길버트(N. Gilbert)의 ‘분석적 프레임(analytic frame)’이 지닌 가치는 여전히 크다고 할 수 있다. 티트머스는 사회복지 정책 설정은 사회적 욕구를 확인하고 욕구 충족을 위한 제도의 기능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핵심적 과업임을 강조한다. 즉 티트머스에게 사회복지 정책은 유기적 전체로 생활하는 사회가 특정 구성원의 욕구를 사회적 의제로 구성해서 그 실현을 표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사회복지 정책의 전략과 목표는 인간 욕구의 제도화라는 언술이다(Dean, 2010: 3-4; 오세근, 2019, 133). 길버트는 파악된 사회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정책 설계는 네 가지 차원의 선택을 거쳐 제도를 만들고 서비스로 가시화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우선, 누구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가 하는 정책 대상의 설정과 한정(social allocation)이다. 다음으로 어떤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가 하는 서비스 급여 형태(social providence)의 결정이다. 그리고 서비스 전달은 어떤 체계를 통해 할 것인가(the strategies for delivery)를 설계한다. 나아가 사회적 급여와 서비스 제공에 쓰이는 재원 조달(the ways to finance)을 궁리한다(닐 길버트, 2007: 111-157). 살펴보았듯이 사회복지 정책 수립과 평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티트머스와 길버트의 사회정책은 사회 구성원의 욕구 파악과 충족을 위한 어프로치로 이해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곧 사회복지 정책을 통해 다양한 사회문제를 풀어내려는 지적 궁리는 무엇보다 사회적 욕구에 근거한 디자인이어야 하고, 정책 효과 역시 사회적 욕구 충족과 연관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Dean, 2010: 1-2; 오세근, 2019: 132).
살펴본 바와 같이 사회복지 정책 평가의 핵심 논지 가운데 하나는 정책 설정에 끌어 쓰는 데이터나 자료가 사회구성원의 욕구를 얼마만큼 정확하고도 적확하게 반영하는가이다. 이 글은 현행 치매 정책 평가 그 자체가 논의의 초점이 아니며, 문제의식의 범주 역시 넘어서는 것이라서 치매 정책 평가와 관련한 상세한 내용 서술은 다른 지면으로 넘긴다. 하지만 현행 치매 정책 수립의 바탕 데이터나 통계 자료 확보 메커니즘을 단순 분석해도 정책 대상이자 주체인 치매 당사자의 욕구를 확인하고 그것을 다시 사회적 욕구로 재구성하는 과정 자체가 부재하다는 것은 치명적 결함이다. 우리사회의 아동, 노인, 장애인, 저소득층 등의 삶의 안정을 위한 정책, 제도, 서비스 구축 과정을 복기해 보아도 국가의 일방적 정책 구상과 임의적 서비스로부터 점차 당사자 욕구에 근거한 합리적 제도와 서비스 창출을 지향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보건의료 영역에서도 환자의 질병 경험과 당사자의 다양한 욕구에 근거한 정책과 서비스 개발로 이어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조성은 외, 2019: 309-397). 그럼에도 유독 현행 치매 정책 디자인의 사정만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치매 진단을 받은 사람은 그 상태와 무관하게 인지력⋅기억력⋅판단력⋅의사소통 능력을 상실하여 일상생활 수행이 불가능한 사람으로 등치하는 데서 연원한다. 따라서 치매인이 표출하는 욕구와 의사 표현은 인정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족, 의료, 사회가 보호하고 관리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져 사회관계의 연결 고리에서 떼어 내쳐진다. 치매인의 삶의 자율성에 대한 불인정 혹은 배척은 치매 정책 설정에서도 치매 당사자보다는 치매인을 돌보는 가족, 의료인, 요양보호사, 간병인 등의 경험과 욕구에만 주목하도록 하여 치매인의 이익, 권리, 존엄의 심한 손상으로 이어진다(최윤영, 2020: 113-119).
치매인을 사리 분별 못하고 일상생활을 꾸릴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을 당연시하며, 치매인이 표출하는 욕구 등을 지지하는 정책과 제도 성립을 저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의학, 약학, 생물학 등이 결합한 ‘생의학적 관점(biomedical model)’이라고 할 수 있다.
치매의 생의학적 관점은 1910년 독일 의사 크레펠린(Kraepellin)이 자신의 책에서 치매의 병리적 인과를 발견한 제자 알츠하이머의 이름을 따서 ‘알츠하이머병(Alzheimer’s disease)’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성립한다(양현덕, 2016: 66-68). 생의학 모델에서 치매인은 알츠하이머 등의 생물학적 병인(etiology)으로 인지⋅기억⋅언어소통 능력을 상실하여 ‘정상인’의 합리적 이성 기능의 최적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다. 때문에 치료하거나, 정상적 생활양식에 적응하도록 관리하고 통제하는 수동적 대상이 된다. 반면 의료 전문가는 전문 지식으로 치매인의 기능 제한이나 손상의 부정적 결과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유일한 전문가이다. 생의학 모델에 의해 치매를 이해하고 서비스 교육을 받은 돌봄 전문 인력 역시 치매인을 환자 혹은 관리 대상으로만 간주하기에 치매인을 보호 프로그램에 따라 통제하면서 보살피는 것이 표준 돌봄 방식이 된다. 이처럼 생의학 모델은 의료 전문가 또는 복지서비스 전문가로 하여금 치매인의 삶의 내용과 형식을 규정하고 정보를 통제해서 치매인의 삶의 선택과 결정할 권리를 부정하는 과학적 근거의 역할을 수행한다(셰익스피어, 2013: 36-37; 조한진 외, 2014: 79).
이러한 치매의 생의학적 관점은 크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근현대라는 시대의 세계관과 인간관의 반영이기도 하다. 근현대의 세계관과 인간관은 기억과 의식에서 지속성과 연속성을 지니고 자립해서 독립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을 인간 정체성의 실체로 규정한다. 따라서 기억하고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은 사람다움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하여 자연스럽게 혐오, 낙인, 차별의 대상이 된다(정종민, 2021: 359-360). 그리하여 치매 노인은 삶의 자발성을 빼앗기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가족이나 시설 돌봄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맡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치매 노인은 창피하고 곤혹스러운 일을 저지르는 골칫거리로 여겨져 가정이나 지역사회에서 보이지 않도록 숨겨진 채 존재의 경험과 욕구 표출의 승인을 거부 받는다(井出訓 編, 2015: 221). 이렇게 보면 치매인의 돌봄, 사람다움의 지지와 옹호를 국가와 사회가 고민하고 제도화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치매 당사자가 경험하는 세계에 대한 의도적 무관심, 배제, 침묵시키기, 욕구의 은폐 속에서 ‘타자들이 외부에서 구성’한 것에 다름 아니다.
2.
치매인 당사자주의 실현을 위한 정책 구상의 기저로서 ‘치매인의 자서전 서사’
치매 관련 정책 구상과 서비스 실행에서 치매인의 욕구를 배제하거나 경시하는 이론적, 실천적 배경인 생의학 담론의 특성과 치매인 욕구 배척의 사상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 절에서는 우선 생의학적 담론이 치매인의 욕구를 승인하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인지를 그 학문적 배경과 연관지어 다시 조망한다. 다음으로, 생의학 관점을 넘어서 치매 당사자의 욕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함을 강조하는 새로운 연구 흐름을 정리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치매 당사자의 경험과 욕구’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방법이자 이론 구성의 형식으로서 ‘내러티브론(narratology)’ 구체적으로는 ‘치매인 자서전의 서사 분석’을 언급한다.
치매를 이해하고 진단⋅처방하는 방식에서 주류적 입장인 생의학 관점은 최근 보건의료 정책 수립의 패러다임 역할을 하는 ‘근거기반 연구(evidence-based research)’ 혹은 ‘과학적 기반 연구(scientifically based research)’와 학문적 가치를 공유한다. WHO는 세계 여러 나라에 근거중심 보건정책 수립을 권유하면서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첫째, 근거는 체계적 방법을 적용한 경험⋅관찰 등에 의한 사실 파악이며 그에 대한 평가를 포함한다. 둘째, 서로 다른 유형의 근거가 존재하므로 신뢰할 수 있는 판단을 체계적으로 수행한다. 셋째, 모든 근거는 그것이 생산된 사회적 맥락의 특수성을 갖는다. 넷째, 정책과 사업의 비용 효과성에 대한 체계적 문헌 고찰은 최선의 근거이다(김남순 외, 2013: 21-23). 증거기반 연구의 일반적 개념은 현장 연구 경험이 더해져 그 지향점이 더욱 선명해진다. 우선, 관찰이나 실험에서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을 사용한 연구를 가리킨다. 다음으로, 진술된 가설을 검증하고 도출된 일반적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밀한 자료 분석 방법을 사용한다. 나아가 연구 결과에 근거해 반복 연구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실험 과정을 상세하고 명확하게 제시한 연구를 말한다(박지연, 2012: 15-16; Brownson, 2018: 1-29).
생의학을 포함한 근거기반 시점에서 치매 관련 정책 연구와 실천이란 치매인의 인지저하 증상, 문제 행동, 언어 사용 등을 관찰⋅실험⋅조사⋅측정해서 객관적 데이터를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엄밀한 과학적 활동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연구자나 의료인이 치매인의 관찰 가능한 증상⋅행동⋅태도 및 가족 면담 자료 등에 근거해 치매 관련 복수의 사실 사이에 성립하는 가설의 진위를 판별해서 인과율이나 관계의 상관성을 제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佛敎大學通信敎育部 編, 2002: 229; 鈴木聡志, 2015: 37-38). 이 점에서 근거기반 관점은 개성적이고 주관적인 데이터를 넘어 검증을 반복하고 객관성⋅중립성⋅보편성을 담보하는 자료 분석과 동전의 양면이다. 그렇기에 치매인의 관찰 가능한 인지 상태를 기능적으로 측정해서 문제 행동과 실증적 인과관계를 제시하는 데는 유용하다.
하지만 과학성과 객관성은 치매인의 감정, 관심, 기분 등은 주관적 속성을 지닌 것으로써 데이터에서 배제하도록 한다. 치매가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치매인의 생명 유지와 발현을 이끄는 몸에 밴 습관, 본능적 판단, 정서적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수치화하기 어려운 자료로 여겨 무시하는 것이다(北中淳子 外, 2016: 142). 이 때문에 근거기반의 생의학에서 치매인의 감정, 체험과 경험의 의미, 욕구 등의 질적 정보는 ‘데이터’와 비교해 중요성이 훨씬 덜한 ‘사례’나 ‘증상 보고’로서 다루어진다. 그리하여 치매인의 고유한 인간성, 독특한 경험은 인정받지 못한 채 정책과 실천의 곁다리로 전락한다(齋藤環 外, 2021: 157-161).
생의학에 의한 치매 ‘실증’과 진단은 인지능력을 상실해서 생활 능력을 잃은 사람과 자립적 시민을 구분하는 타자 획정의 근거가 된다. 이는 치매인을 사회 구성원의 역할 범주 수행에서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과정 그 자체와 동의어이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부터 치매인은 인지기능을 상실한 비정상인 존재이기에 돌보고 관리하며 감시해야 하는 타자로서 접근하는 생의학 입장에 비판적 성찰이 시작된다. 치매인 혹은 치매를 ‘생애주기 과정에서 새롭게 경험하는 삶의 방식’이자 ‘독특한 질병 경험’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이 발아한 것이다(정종민, 2020: 489-492). 생애주기 과정에서 치매로 인한 삶의 양식 전환, 그에 따른 새로운 인간적 정체성 획득이라는 입장에서 치매를 이해하는 시각 전환에 앞장선 것은 키트우드(T. Kitwood)를 중심으로 한 ‘사람중심 돌봄(person-centered dementia care)’이다. 사람다움을 인간 상호작용 과정의 구성물로 간주하는 인본주의 심리학을 치매인의 치료와 돌봄 연구에 확장해서 적용한 사람중심 관점은 치매인의 삶 자체와 그의 욕구에 주목함으로써 돌봄의 질과 의사소통 기술의 변화를 끌어낸다(정종민, 2021: 358-360).
사람 중심 접근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다. ① 치매는 관리해야 할 질병이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질병이다 ② 치매 돌봄은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일이고, 진단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유일성과 개별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③ 모든 사람은 인지 기능에 상관없이 평등하다 ④ 치매인의 문제 행동은 의사소통을 하려는 시도로 보아야한다 ⑤ 치매인의 인간다움을 지키고 삶의 환경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치매인의 독립성, 자율성, 개인적 성장, 기쁨, 즐거움, 의미 있는 활동, 삶의 만족, 안녕감을 부여하는 것이다(Brooker, 2019: 15-21).
또한 치매 진행에 따라 나타나는 기억력⋅판단력⋅의사소통 능력의 상실을 사회는 어떻게 포용하며, 치매인의 질병 경험을 시민의 다른 질병 체험과 동등하게 존중하고 인정받을 수 있게 할 것인가에 대한 ‘권리기반 접근(right-based approach)’ 시각도 새롭게 제기된다(정종민, 2021: 360-364). 논의의 성과로 치매인의 인간다움과 안정 보장을 위해 그를 사회서비스의 수동적 수혜자로부터 적극적 참여자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권리에 대한 인식이 확산된다. 그뿐만 아니라 치매 당사자가 생존에 필요한 다양한 관계 유지와 삶의 주체로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욕구 승인의 권리에 대한 관심 역시 고양된다(최희경, 2017: 70-74).
치매의 생의학적 관점을 넘어 치매인의 입장에서 치매를 이해하고 그들의 욕구 자체에 주목하는 사람중심, 권리기반 접근은 치매인의 돌봄과 삶의 질 고양에 긍정적 기여를 한다. 하지만 그 문제의식의 타당함에 비해 이론적 성취는 당위적 수준에 머무른다. 치매 당사자는 누구를 말하며, 당사자 욕구는 실제 어떤 방법을 매개로 파악해야 하고, 실천의 성과를 이론 수준으로 고양하기 위해 어떤 지적 작업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천착이 미흡하다. 예를 들면 치매 당사자라고 지칭할 경우에도 치매를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고 있는 본인 자신, 나아가 치매인과 함께 살면서 때로는 그와 갈등하는 가족 역시 치매 돌봄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사자 범주에 포함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지금 여기 자신의 삶의 상황을 그가 바라는 상태와 비교해서 부족하다고 파악하고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사람, 즉 스스로의 욕구를 알고 있는 치매인 본인만을 본연의 당사자로 한정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井出訓, 2015: 221).
이런 입장에서 ‘치매 당사자의 경험과 욕구’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방법이자 이론 구성의 형식으로 ‘내러티브(narrative)=치매인의 자서전 서사 분석(autobiographical narrative analysis)’의 의미와 핵심 내용을 개관하고, 치매 당사자 서사로서 자서전을 분석하는 틀을 구상한다. 사회정책, 특히 사회복지의 이론과 실천은 당연히 전체 사회구성원의 삶의 조건 개선과 질의 고양을 목적으로 한다. 그럼에도 자신 스스로 또는 가족 단위로도 생활 과정의 여러 문제에 대처하기 어려운 사회 구성원을 더 세심하게 살피는 것은 사회 통합과 안정이라는 공공성 실현을 위해서이다. 사회적으로 배제되거나 고립되기 쉬운 사람, 사회 제도가 파악하지 못해 사각지대에 가려져 내팽개쳐진 사람의 생활 문제와 거기서 파생한 욕구를 찾으려고 할 때, 나아가 그들이 경험하는 다면적 욕구 그 자체를 수량화하는 것이 곤란한 경우에 질적 연구의 필요성과 유용성은 널리 받아들여진다(Travers, 2008: 1-14). 주지하듯이 질적 연구는 증거기반의 실증 연구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대상이나 당사자의 경험, 감정, 정서, 행위 선택 등에 담긴 주관적 의미 이해를 지향한다. 그런데 질적 연구 역시 인식의 본질이나 과정에 대한 시각, 가치론적 전제, 자료 해석의 이론적 틀, 활용하는 학문 분야와 탐구 주제에 따라 다양한 유형이 있다. 덴친(N. Denzin)은 사회과학에서 사용하는 주요한 질적 접근을 해석학적 실천, 사례연구, 근거이론, 생애사, 내러티브, 참여 연구, 임상 연구 등으로 나누어 보여준다(Creswell, 2015; 33-62).
이 가운데 ‘내러티브’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의 특정한 경험을 드러내고 그들이 자신을 둘러싼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고 적응하며 생존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효율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Martin, 2005; 38-50). 내러티브라는 용어는 다의적이고 모호해서 그것을 전형적 개념으로 서술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많은 연구자는 내러티브를 개인의 일상 행위나 사건을 시간의 선후와 상호관련성에 따라 에피소드 단위로 묶고, 개별 에피소드를 통일된 주제가 있는 이야기 시점으로 재배치하여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게 하는 인지적 조직과정으로 이해하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말하자면 내러티브는 개별 사건과 행동이 전체 삶을 이루는 부분으로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내보이면서 주체의 경험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려는 앎의 한 갈래이다(Webster, 2007: 12-24; Polkinghorne, 2009: 19-55). ‘내러티브 연구(narrative inquiry)’는 당사자/대상자의 경험에 언어를 매개로 의미를 부여(외현화)한 자서전, 전기, 일기, 개인 구술과 같은 내러티브 자료를 분석해서 주체의 경험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고 사회⋅문화⋅역사적인 것과의 상호작용 맥락을 밝히는 것이다(권지성 외 2008: 197-211). 이 과정을 통해 내러티브는 단순한 개인의 체험을 넘어 사회적 존재의 경험으로 인정되고 공유되어 주관과 객관, 자아와 타자, 개인과 구조라는 이항 대립을 지양해 간다.
그런데 내러티브 분석 이외에도 치매인의 체험을 당사자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질적 연구 또한 다양한 방향에서 진전해 온 것 역시 사실이다. 코헨(Cohen)의 연구는 알츠하이머 치매인의 주관적 심리 변화의 체험 단계를 기술하고 개념화한 당사자 관점 접근에서 가장 앞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코헨은 치매인의 치매 진단부터 치매를 인정하는 각 단계의 욕구를 밝히면서 치매인의 혼란스러운 행동은 많은 경우 가족이나 돌봄 전문가가 치매인의 인지적 퇴화와 욕구에 잘 대응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것임을 알린다(Cohen, 1986). 코트렐(Cotrel)은 알츠하이머 치매인의 느낌, 치매 진단 수용 태도, 대처와 관련한 체험을 분석해서 치매에 대응하는 태도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정신적으로 도피하거나, 현실을 부인하는 등 사람에 따라 상당히 다름을 밝힌다. 나아가 치매인은 자신을 돌보는 사람의 성실함과 금전적⋅물질적 소유에 상당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 불안이 가족 관계나 돌보는 사람과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山田富秋, 2004: 17-175).
코헨과 코트렐의 연구는 증거기반의 치매 연구를 넘어 치매 당사자의 체험과 정서, 행위 표출에 담긴 주관적 의미 이해까지 나아간 점에서 진전이다. 하지만 이들 연구는 치매 당사자에게 치매는 도대체 어떤 경험이고, 치매와 더불어 사는 그에게 삶이란 무엇이며, 치매인은 일상 어떤 생각을 하고, 치매 진단을 받은 이후 자신의 생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자신을 돌보는 사람에 대한 느낌은 어떤 것이고, 자신을 돌보는 사람에 의해 무슨 영향을 받는지와 같은 치매 당사자가 자신의 삶의 조건과 그 변화에 부여하는 의미 그 자체의 인식에는 이르지 못한다. 달리 말해, 치매 당사자의 언어 발화 그 자체를 매개로 치매인이 자신의 존재 상황에 부여하는 의미 해석과 자기규정의 내적 논리의 실제 회로는 찾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치매 진단과 그 이후 삶에서 치매인 자신의 고민, 상실과 와해, 삶의 양식 변화에 대처하는 의지와 열망 같은 자기 표출의 실존적 서사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치매인의 삶의 대전환을 가져온 치매 진단과 그 이후 내밀한 개인 경험을 언어로 서술해서 시간 흐름에 따라 재배열하는 전형적 서사 자료는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Sidonie, 2001: 4-15). 자서전은 당사자가 자신을 서술하는 형식의 글이기에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이면서도 자신을 돌아보고 살핀 사려의 산물이라서 ‘성찰적 거리(reflective distance)’를 만들어 낸다. 이 성찰적 간격은 자서전의 주관성을 덜어냄과 동시에 객관적인 ‘상호 주관성’을 구성함으로써 주체적이고 내면적 서사인 자서전을 다른 사람의 공감을 불러오는 객관적인 자료로 전환시킨다(문광훈, 2023: 20-23). 그래서 딜타이(W. Dilthey)도 자서전은 언어를 매개로 삶의 힘과 폭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어서 한 사람의 개인적 생애를 뛰어넘어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마주하게 하는 가장 유익한 형식이라고 말한다(빌헬름 딜타이, 2009: 32-36). 다만 치매를 진단받은 사람의 글쓰기라서 서사 데이터로서 신뢰성에 대한 우려가 없지 않다. 자식의 얼굴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인의 지리멸렬한 내적 세계의 논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당치 않다는 것이다(나카무라 유지로, 2004: 121). 많은 연구자가 전제하는 것은 연구 대상자의 논리적 언어활동과 일상 행위의 합리적 일관성이다. 하지만 치매인의 자서전은 치매가 되면 그 증상의 정도에 상관없이 아무것도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주장 그 자체가 편견이며 낙인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역설적 근거가 된다. 나아가 치매 당사자의 성찰적 글쓰기를 신뢰성이나 타당성을 이유로 연구 자료에서 배제하는 것은 바로 치매 연구자의 상상력의 결핍과 철학의 빈곤을 반증하는 자료가 되는 것이다.
Ⅳ.
치매 당사자 ‘자서전의 서사 분석’과 치매인 서사가 말하는 치매 정책의 새로운 방향
1.
치매인 자서전의 서사 분석
앞 장에서 살핀 내러티브 관련 이론적 논의를 전제로 치매인의 자서전을 ‘서사 분석’하는 목적과 의미, 연구 대상의 분석 과정과 분석에 사용하는 틀, 분석 과정에서 다룰 핵심 주제를 제시한다. 우선, 치매인의 자서전을 서사 분석하는 목적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치매 당사자의 욕구를 알아내서 그의 생활을 지원하고 돌보기 위해서이다. 치매 당사자가 자신의 치매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무엇을 바라는지를 아는 것은 그의 사람다움과 인격을 어떻게 옹호하고 지지할 것인지를 아는 것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좋은 돌봄 행위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기도 하다. 둘째, 치매 당사자가 불안⋅고립⋅차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하며 극복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확장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셋째, 치매인이 자신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야기로 구성하면서 자신의 타자화된 삶을 되돌아보고 능동적 생명력으로 대체하는 자기 치유 효과를 발견한다. 넷째, 치매인의 돌봄 정책⋅제도⋅서비스에 담긴 개인, 가족, 사회, 문화, 정치의 상호작용의 맥락을 들여다볼 수 있다. 다섯째, 다음 세대에게 치매 관련 온전한 지식을 전승하는 것은 치매에 대한 편견, 차별, 낙인의 인식을 전환해서 치매인을 고립, 무기력, 배제된 삶으로부터 연결된 삶으로 이끄는 모멘텀을 형성한다.
이어서, 대상 자료를 분석하는 과정의 개요이다. 분석 과정은 무엇보다 치매인은 자신의 치매 경험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치매 당사자의 치매 체험과 경험의 시간성 및 발화), 치매인은 생애주기의 대전환으로서 자신의 치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사회적 역할 수행과 직업 활동 공간에서 인간관계 의미 변화. 개인적 가치관과 행위 선택 등 사회적 관계의 연속성과 단절)를 찾아가는 노정에 다름 아니다. 그 탐색은 다음 절차를 통해 수행한다.
다음으로, 위에서 제시한 분석 틀을 적용해서 대상 자료(McGowin, 1993; 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하세가와, 2021; 웬디 미첼, 2022)를 해석할 때 검토할 주요한 서사 항목은 다음과 같다. ① 치매의 전조 증상 ② 치매 진단과 심리적 충격의 주관적 경험 ③ 치매 진단 수용 이후 스스로의 치매 질환 규정과 자신의 상태 인식 ④ 치매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의 고뇌, 불안, 공포감 ⑤ 치매 수용 이후 생존 전략과 대처 기술 ⑥ 치매인 당사자의 생존에 긴요하다고 보는 욕구 ⑦ 치매인임을 세상에 공개한 이유 ⑧ 치매라는 질환을 통해 얻게 된 것 ⑨ 치매인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기대.
치매인 당사자의 자서전을 서사 항목에 따라 분석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치매의 전조
치매인은 자신이 치매 진단을 받는 계기가 되는 일상생활의 이상 징후나 자각 증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혼인 아들 내외가 집에 오기에 저녁을 가족이 함께 하기로 했다. 가족 모임을 녹화하기 위해 테이프를 가지러 갔을 때 목제 데크가 갑자기 눈앞에서 솟아오르고, 흔들리는 느낌이 있어서 비틀거렸다.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점심을 준비해 회사 사무실로 가져다주었으면 한다. 도시락을 만들어 차에 탄다. 도시락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순간 멍했다. 차에서 약간 쉬고서야 차를 운전했다. 여러 번 온 곳인데도 수 마일을 가서야 길을 잘못 들어 선 것을 알고 정신이 혼란스러웠다(McGowin, 1993: 1-10)
우리 집 차고에서 나와 왼쪽으로 턴한 후 그 길모퉁이에서 다시 우회전 하면 T자형 교차로가 나온다. 그런데 갑자기 우회전을 해야 될지, 좌회전을 해야 될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의사는 뇌 CT 촬영, MRI를 권했다. 나는 가끔 출근길에 길을 잊어버리거나 문장의 철자가 틀리거나 가까운 동료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털어 놓았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59-62).
아무래도 이상하다. 전에 가본 적이 있는 곳이니 당연히 갈 수 있어야 하는데 갈 수가 없다. 오늘이 몇 월 며칠이고 뭘 하려고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직접 체험한 일인데도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고 머릿속이 흐릿해지기 시작하더니 내가 한일과 하지 않은 일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하세가와, 2021: 23).
시각, 청각, 미각, 후각의 변화. 패턴이 있는 카펫은 모든 문양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서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게 한다. 반들반들 대리석은 수영장처럼 보인다. 벽면 TV는 벽에 난 커다란 구멍 같다. 찾는 물건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안 떠오른다. 내 전화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이 안 난다. 핸드백 안이 어두워서 물건을 찾는 것이 어렵다(웬디 미첼, 2022: 38-44).
2)
치매 진단과 심리적 충격의 주관적 경험
치매인은 치매 진단의 충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생애주기의 대전환으로서 치매라는 현실에 대해 거부⋅분노⋅두려움⋅우울⋅고립⋅수용 가운데 어떤 감정을 지니고서 통과해 가는지 알아보자.
알츠하이머라 진단을 받은 때 나는 컴컴한 방에서 혼자 틀어 박혀 있었다. 전화가 울려도, 방에 노크를 하여도 답하지 않고(McGowin, 1993: viii). 나는 검사 결과 의견을 남편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위축될 때 항상 나에게 힘을 주던 친구 엘리스에게 전화를 했다. 의사는 일을 그만두고 장애인 등록을 하도록 권한다. 나는 항의했다. 나는 장애인이 아니라고 거부한 것이다(McGowin, 1993: 32-45). 자신의 상태를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도 숨긴 것은 부끄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나를 가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낀다면 나는 꼼짝 못할 것이다(McGowin, 1993: 53).
문제는 뇌가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는 뇌가 기능을 상실하면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인데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조차 잊게 될 것이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82).
치매에 걸린 후에 증상이 진행되고 있는 자신을 또 다른 내가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하세가와, 2021: 14).
나는 대부분의 사람처럼 두려웠다. 내 앞에 드러날 병의 계획된 경로가 무서웠다. 나는 갑자기 삶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것 같았다(웬디 미첼, 2022: 6). 치매 진단은 지나치게 임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뇌를 들여다보고 뇌 세포 간의 연결이 느슨해졌거나 사라진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고 나면 우리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된다(웬디 미첼, 2022: 62-63). 더 이상 해줄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내 인생의 종말이 왔다는 느낌을 받은 채 병원을 떠났다(웬디 미첼, 2022: 222).
3)
치매 진단 수용 이후 스스로의 치매 질환 규정과 자신의 상태 인식
치매 진단을 받고 난 후 치매인은 치매라는 질환을 스스로 어떻게 규정하는가. 나아가 치매로 인해 바뀐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살펴보자.
머리가 혼란스럽고 방향 감각을 잃어버려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직장을 그만두기로 한다. 집에서는 간단한 요리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생각하다가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마저 잊어버린다. 오래 된 어린 시절 기억 같은 것은 선명하면서도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같은 것은 기억이 없다. 가장 곤란한 것은 인내력을 잃어버리고 신경과민이 되어 가는 것이다(McGowin, 1993: 64-65). 점차 우울이 심해간다. 공간 감각을 잃어버려서 마트에 가는 것도 남편에 의지하여 간다. 남편은 가능한 한 밝은 모습으로 나를 위로하지만 눈물을 그칠 수 없다(McGowin, 1993: 73).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 삶의 변화를 수용하기 시작했고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공부도 시작했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70). 나는 이미 많은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예전과 달리 성격이 직선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생각의 흐름은 더욱 느려지고 있다. 낙천적인 성격과 새로운 변화에 대한 흥분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정열과 욕구도 모두 사라져버렸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85). 기억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입체적이던 사고는 논리적 결합을 잊은 지 오래다. 쇼핑하러 갈 때도 메모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일기를 보지 않으면 오늘이 무슨 날이고,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99). 나는 알츠하이머병 환자가 재촉을 받거나, 요구를 받았을 때 몹시 폭력적으로 변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나는 이것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며 그리고 왜 싫은가를 표현할 수 없는 데서 나오는 불만의 표출이라고 이해하면 된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117).
지금 증상이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자각은 있습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이 생각하는 만큼 급격하게 나 자신이 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치매가 생겼다고 사람이 갑자기 바뀔 리는 없겠지요.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의 연장선상에 좀 더 노화된 자신이 있을 뿐입니다. 치매에 걸리고 절실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치매에 걸리면 증상이 하루 종일, 그리고 매일 지속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 경우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컨디션이 무척 좋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피로해져서 저녁이 되면 머릿속이 무척 혼란스러워집니다. 하지만 하룻밤 자고나면 다시 상쾌하고 새로운 자신이 되살아납니다. 한마디로 그때그때 몸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하는 겁니다(하세가와, 2021: 12-13). 걸음이 느려지고 보폭도 좁아져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기 일쑤다. 일어나 걸으려고 하면 현기증이 나거나 다리가 후들거린다. 뇌가 지령을 내려도 팔다리의 말초신경이 말을 듣지 않는다. 신경전달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95세까지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싸움, 고통, 고뇌의 연속이다(하세가와, 2021: 199-202).
치매는 우리와 음식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수치심을 느끼며 식사해야 했기 때문에 나 자신이 멍청이 같았다. 고기를 먹을 때 얼마나 오래 씹었는지 또 얼마나 더 씹어야 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뜨거운 음식도 곤란하다. 뜨거운 감자를 입에 넣고 또 넣었기 때문이다(웬디 미첼, 2022: 16-19).
4)
치매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갖게 되는 고뇌, 불안, 공포감
치매인이 치매와 더불어 사는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불안이나 공포 등 부정적 심리 유형은 무엇이며, 일상생활의 갈등⋅사회적 고립⋅건강 악화 등의 문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들여다보자.
나는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다. 아직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것이 많을 것인데도 나의 능력은 매일 쇠퇴한다(McGowin, 1993: 47-48). 동창회 모임에 나가면서도 지적 능력의 쇠퇴가 알려지지 않을까 무섭고, 길을 헤매거나 만남 장소를 찾아가지 못할까, 친구들에게 환영받지 못할까 두렵다. 친구 몇 명은 내가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인양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McGowin, 1993: 75-76). 자신의 집, 식사, 가족, 운전 등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때가올지 몰라 두렵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존엄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지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McGowin, 1993: 82-83). 나를 둘러싸고 있는 두려움은 항상 비슷한 것이다. 그것은 나의 증상이 더 나빠져도 남편은 나를 보호하고 보살펴 줄 것인가이다(McGowin, 1993: 103).
처음 6개월 동안 나는 질병이 어떻게 진행되며, 어떤 식으로 악화될 것인지를 알지 못해 무척 답답했다. 이런 갖가지 의문과 걱정들이 내 마음을 괴롭혔다. 이처럼 확산되는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딸들과 함께 우리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인 편견과도 맞서야 했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71). 무엇보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대체 어떤 사람이 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언젠가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잊게 되고 내 딸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고, 친구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쓸쓸하고도 두려운 일이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83). 누군가 내 곁에 있어주지 않는 한 나는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내 머리 속에서는 묻는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하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105). 소란스러운 장소에 가면 감각이 평소보다 훨씬 저하된다. 알츠하이머병 환자가 멍하니 무언가를 바라보는 이유는 너무나 많은 자극에 두뇌가 지쳤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것을 받아들여 정작 중요한 것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데 따른 일종의 자괴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113-114).
사람은 누구나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치매 당사자는 계속해서 그런 상황에 처한다. 그러므로 그 심정을 헤아려서 할 일을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좋다(하세가와, 2021: 49).
사람들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우리는 전처럼 쉽게 대답하지 못할 뿐이다. 시간이 걸리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잠시 멍해질 수 있다. 그 때문에 좌절하게 되고 무서워진다(웬디 미첼, 2022: 111-115)
5)
치매 수용 이후 생존 전략과 삶의 대처 기술
치매인은 치매로 인한 삶의 곤란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어떤 생존 전략을 고안하며, 구체적인 문제 상황에 어떤 기술로 대처하는지 알아보자.
최근 사람을 사귈 때도 기억장애나 방향 감각 상실이 알려지는 것이 무서워 극단적으로 사람을 선택해서 만난다. 누군가 함께 있을 때는 물론 자신에 대해서도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한다. 안전거리를 둔다면 누구도 나의 지적 능력이 쇠퇴해가는 것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McGowin, 1993: 48). 의사에게 다른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고 말했다. 의사는 나를 격려하면서 도움 될 일이 있을지 모르니 자신에게도 보여주면서 써 가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글을 쓰는 것은 조바심을 덜어내는 것은 물론 뇌 세포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McGowin, 1993: 72). 자신이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고통스러운 시기도 있다. 그럼에도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더욱 매달리고 싶다(McGowin, 1993: 113).
나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이후 겉모습 꾸미기 작전을 시작했다. 웃거나, 농담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엉뚱한 말을 하지 않도록 천천히 이야기하고 질문은 될 수 있는 한 삼간다. 상처받은 지능의 한계로 문장이 의도와 다르게 흘러갈 때는 적당히 중간에서 얼버무린다. 누군가와 함께 보내는 그 짧은 시간을 위해 나는 온갖 수고와 노력을 바치는 것이다. 정작 상대방이 돌아간 뒤에 나는 기력이 완전히 소진하여 지쳐버리기 일쑤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97). 나는 뇌의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을 인정하고 생활양식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TV 시청도 야생동물의 세계, 정원 가꾸기 등 보기 편한 프로그램만 골라서 본다. 특히 광고는 시신경과 뇌세포를 고통스럽게 자극하므로 광고가 시작되면 소리를 줄여버린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105-107). 나는 매일 아침 상자에 약을 담고, 복용시간에 맞춰 알람을 설정하지만 간혹 약상자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알람 소리를 듣고서도 약을 먹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일기장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물건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일기장을 꺼내 오늘이 어떤 날인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124). 계산 능력은 병의 초기에 상실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대비하여 진단 후 곧바로 이안스에게 내가 가진 모든 권리를 위임하는 문서를 준비했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140-141).
생활환경은 최소한 간소하고 단순하게 하는 것이 좋다. 복잡한 환경은 피해야 한다. 화장실이나 잠잘 곳 등 중요한 장소일수록 기억하기 쉽고 눈에 잘 보이는 곳으로 마련해야 한다. 치매 당사자는 여러 이야기를 동시에 이해하기 어렵다. 한꺼번에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 혼란스러워서 쉽게 피로해진다. 말을 전달할 때 될 수 있으면 간략하고 쉽게 한 가지씩 말한다. 치매 당사자를 단지 다 해줘야 하는 사람으로 여겨 모든 역할을 빼앗지 않도록 해야 한다(하세가와, 2021: 81-82). 아침에 일어나면 한 장씩 떼어 내는 일력을 보면서 날짜와 요일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최근에는 일력 떼어 내는 일 자체를 잊어버리는 날이 많다(하세가와, 2021: 195).
나는 치매를 앓으면서도 혼자 잘 살아가고 있다. 혼자 생활하면 재촉하거나 의심하는 사람도 없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나한테 가장 나쁜 말은 빨리 해라다. 하지만 혼자 생활하면 내 속도에 맞게 하면 된다. 혼자 살면 내가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했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일을 다르게 하고 있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 내가 틀린 단어나 날짜, 이름을 말해도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웬디 미첼, 2022: 80-82). 동료를 만나기 전 많은 사람은 혼자 있다는 느낌. 진단 받고 몇 달은 캄캄하고 가끔씩 자살 충동도 느끼고. 그러나 친목 모임에서 다시 활기차게 생활한다(웬디 미첼, 2022: 246-248).
6)
치매인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채우고자 하는 욕구
치매인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나아가 인간적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 어떤 형식과 내용을 갖는 가족관계, 사회관계를 바라는가. 그리고 자신을 돌보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태도는 무엇이며, 자신의 고립⋅배제된 상실감을 넘어서는 버팀목으로써 종교나 신앙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확인해 보자.
알츠하이머병 환자는 자신을 생각해주는 존재, 그리고 알츠하이머라는 미로의 여행길을 지켜봐 줄 존재를 필요로 한다(McGowin, 1993: viii). 마음의 불안이나 두려움을 누군가에게 알릴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일까. 앞으로 어떻게 되더라도 누군가 내편이 되어 함께 싸워주고, 필요한 때 나를 위해 싸워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용기와 사랑과 정신적인 지지를,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돌보아 줄 사람을 원한다(McGowin, 1993: 53-54). 오늘 현재만이라도 살아내는 힘을 나는 갖고 있지 못하다. 언젠가는 이마저도 할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하루하루를 사는 것을 배워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McGowin, 1993: 83). 나는 성욕이 강한 편이었지만, 알츠하이머병이 진행함에 따라 성적 욕구가 더욱 강해진다. 친구의 권유로 바이브레이터를 사용한 마스터베이션을 통해 성욕을 충족하기로 했다. 알츠하이머 진행은 점차 자신의 근원적인 욕구를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McGowin, 1993: 84-87). 나는 남편이 정신적으로 지지해 주는 것을 바란다. 거기에 앞으로도 계속 보살필께라는 말을 몇 번이고 듣고 싶다. 내 병이 더 나빠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상냥하게 진정으로 보살핌을 받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귀찮은 존재 취급을 받아 가족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인지. 더 나쁘게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것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을지. 적어도 살아있음의 위엄과 삶의 질을 계속 가질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어떤 가치나 감정도 없는 인간 폐품 취급 받을 것인지. 장래가 아무리 불안해도 나는 자살 하려는 생각은 없다. 이것은 나의 신념이다(McGowin, 1993: 103-105).
나는 신앙이 있었기에 이 잔인한 병과 싸울 수 있었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18). 내가 얼마나 나쁜 상태인지를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누구인지를 떠올릴 수 없고, 감정과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지원과 도움을 필요로 한다. 가족이나 친구 중 누군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게 된다면 예전처럼 동료로 인정하고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체험하도록 도와주길 바란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86).
한번 걸리면 끝이라든가,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특별 취급도 말아 주세요. 치매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당연히 해왔던 평소의 생활이 점점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치매 당사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이 장애 정도를 훨씬 줄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꼭 알려드리고 싶습니다(하세가와, 2021: 13). 치매를 앓는 사람은 슬프고 괴롭고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매일을 살아간다. 그 사실을 여러분이 알았으면 한다. 괜찮아요, 우리가 곁에 있으니까 안심하세요. 이런 메시지를 전해 주는 존재가 있으면 얼마나 든든하고 마음 놓이겠는가. 또 치매 당사자를 단순히 지켜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공감하고 함께 걸어가고자 한다면 얼마나 용기가 날까요(하세가와, 2021: 34). 치매에 걸린 사람은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없을 뿐더러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모를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치매 당사자를 무시하거나 편견에 갇힌 발언을 내뱉어 상대의 인격에 상처를 입힌다. 하지만 치매 당사자에게도 다른 사람의 말이 다 들린다. 자신을 험담하거나 비웃음 받을 때 불쾌한 감정은 가슴 깊이 생채기를 낸다. 설령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해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멸시받을 때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큰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치매 당사자도 괴로운 경험을 인지할 수 있고 고통과 슬픔도 똑같이 느낀다. 치매 당사자와 관련된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 그들을 빼놓고 결정하지 않아야 한다(하세가와, 2021: 77). 치매에 걸리면 무척 상심하기 마련이지만 크게 낙담하지 않은 것은 신앙이 큰 영향을 미친다. 할 수 있는 것은 다하고 나머지는 운명에 맡기면 된다. 그럴 때 종교가 도움이 된다(하세가와, 2021: 208).
내 정신이 혼미할 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는 느낌이 들면 큰 위안. 그 손은 누군가 옆에 있으며, 천천히 해도 된다고, 괜찮다고 알려줌으로써 위로하는 것이다. 안개가 낀 듯하고 정신이 또렷하지 않을 때 잡아주는 손은 격정을 진정시키는 방법이다(웬디 미첼, 2022: 55-57). 나는 아주 미미하더라도 엄마의 역할을 하려고 한다. 그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일이며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지킬 것이다(웬디 미첼, 2022: 72-74). 혼자 생활하기는 장점이 많지만,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고독한 날에는 마을 사람과 마주치기를 바라고 누군가 던지는 간단한 인사나 미소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아파트 계단에서 나누는 짧은 대화만으로도 큰 교감을 느낀다(웬디 미첼, 2022: 87-88). 처음 치매에 걸렸을 때 내 삶이 다른 사람 손에 맡겨진다는 것이 두려웠다. 이제는 미래가 두렵지 않다. 요양원에는 가고 싶지 않다. 내 생활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으니까(웬디 미첼, 2022: 194).
7)
자신이 치매인임을 세상에 공개한 이유
치매인이 자신의 치매 경험을 에피소드로 묶고 거기에 부여한 의미를 언어로 외현화한 자서전을 써서 세상에 공개한 의도는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나와 같이 정신적 혼란으로 고생하는 사람이나 그 가족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원한다(McGowin, 1993: viii).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McGowin, 1993: 114).
나는 치매 환자입니다. 그렇지만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으로 숨지는 않을 것입니다. 치매가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라는 것, 또 내가 존중과 품위 있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5-7). 전문 호스피스가 쓴 책은 몇 권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입장일 뿐 환자 자신이 겪는 체험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어느 날 이상해진 환자를 가족은 부끄럽게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나는 이런 편견을 타파하고 싶어 이 책을 쓴다. 뇌의 질병을 다른 신체 질병보다 훨씬 부끄럽게 여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환자 자신이 나는 치매에 걸렸다고 주변에 알리는 용기로부터 모든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16-17).
치매 의료와 간병에 관여해서 치료하고 연구해온 제가 치매에 걸렸습니다. 2017년 10월 만 88세 때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저는 제 상태를 세상에 공표하기로 하였습니다. 치매에 걸리는 것이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치매는 누구나 마주하는 문제이므로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하세가와, 2021: 11-12).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치매에 대해 알게 된 것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견디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살아가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웬디 미첼, 2022: 7).
8)
치매라는 질환을 통해 얻게 된 것
치매인은 치매 진단 이후 삶의 과정에서 이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인간적 가능성이나 삶의 의미를 무엇이라 말하는지 들여다보자.
가족과 나는 하나의 현실에 대해 정반대 측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은 무엇이 없어져 가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남아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족이 보는 것이 바른 입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내게서 없어진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게 아직 무엇이 남아있을까라는 관점에서 나를 보는 것이다.(McGowin, 1993: 97-98). 알츠하이머 환자를 지원하는 그룹 활동에 참가하고서 서로 돕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뿐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가족이나 친구가 아무리 자상하게 보살펴 준다고 해도 자신과 마찬가지의 미로를 걷고 있는 알츠하이머병 환자끼리 동료로서 만나는 것은 중요하다. 그들은 내가 필요한 지지와 격려를 준다(McGowin, 1993: 114-115).
나는 딸들의 말 한마디에도 큰 기쁨을 얻는다. 그것은 지금의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의미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152).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자각한 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 치매는 누구나 걸릴 가능성이 있으며 설령 치매에 걸린다 해도 인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 그리고 치매에 걸리더라도 평상시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하세가와, 2021: 25). 치매에 걸려도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이어져 있는 같은 존재이다. 치매에 걸렸다고 해서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하세가와, 2021: 75). 치매에 걸린 후 깨달은 것이 있다. 체험에 온도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오늘 여기에 와 주면 그것은 내게 따뜻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헤어질 시간이 다가와 안녕하는 인사를 들으면 낙담한다. 온도가 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사람과 만나면 온도가 올라가고, 사람과 헤어져 쓸쓸함을 느끼면 내려간다(하세가와, 2021: 205-206).
치매에 걸리면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해져서 직관적인 접촉으로 회귀하는지도 모른다. 딸 이외에는 접촉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치매가 나를 바꾸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을 안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웬디 미첼, 2022: 53-55).
9) 치매인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기대
치매인은 자신이 안심하고 살아가는데 가장 핵심적인 환경 요인을 무엇으로 설정하는지를 확인해보자.
담당의는 자신의 아버지도 알츠하이머인데 돌아가실 때까지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었고, 자신다움을 계속 유지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대단히 용기를 얻었고 안심이 되었다. 낙관적이게 되고, 몸의 상태도 좋아진 것 같다(McGowin, 1993: 107-108). 남편, 가족, 친구가 환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보살핌은 항상 애정과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환자를 의무적으로 돌보거나, 환자를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보살피거나, 환자를 모자란 사람으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 진정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자신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McGowin, 1993: 1157).
이 병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대처 방법을 숙지시킬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간호하는 사람에 지원을 확대하고 환자를 편견에서 해방시켜 줄 필요가 있다. 환자들 또한 자신에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좀 더 능동적으로 대처할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91). 전문의 말에 따르면 뇌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두뇌 체조가 매우 중요하다. 독서를 하면서 주요 인물과 장소, 사항에 대해 메모하는 것도 일종의 두뇌 체조로 시작했다. 또 한 가지는 조용히 앉아서 고양이 등을 쓰다듬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뇌의 휴식시간을 만들어 준다(크리스틴 브라이든, 2005: 124-126).
치매라고 하면 주로 의료와 간병에 초점을 두고 생각하게 되지만 주거 안정이나 교통수단, 일과 삶에서 보람 찾기, 명의 도용이나 소비자 피해 방지, 금전 관리와 재산 보호, 인권 옹호 등 치매와 관련해 마련해야 할 대책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치매에 걸린 사람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으려면 치매 당사자에게 친절한 지역이 만들어져야 한다(하세가와, 2021: 35). 가장 중요한 것은 치매 당사자를 그 상태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일이다. 변함없는 태도로 대한다는 것은 치매 당사자를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치매 당사자를 환자로서만 대하며 삶에서 배제해 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다(하세가와, 2021: 49). 경도 인지장애는 치매가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할 것은 규칙적인 운동이다. 걷기나 조깅처럼 운동을 주 2회 이상하면 기억력과 사고력이 향상된다(하세가와, 2021: 67). 치매 증상을 완화하고 억제하는 약은 생겼지만 치료제는 아직 없다. 또한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발생할 우려도 있다. 나는 뇌의 신경세포가 지칠 때가지 약을 쓰며 파손되는 것을 늦추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자신답게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알츠하이머형 치매 증상이 나타난 시점에서는 아밀로이드 베타, 타우라 불리는 특정 단백질이 뇌 내에 비정상적으로 축적되어 신경세포가 사멸함으로써 병의 증상이 진행된 상태이므로 원인 물질을 제어하려고 해도 소용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하세가와, 2021: 185-186).
간병 역할이 뒤바뀌어 그들이 부모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 방법은 엄마가 의존적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생활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자아감을 유지하게 돕는 것이다(웬디 미첼, 2022: 75-79). 아마 전문가들이 처음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더 집중했다면 우리의 삶은 진단 때부터 훨씬 희망적이었을 것이다(웬디 미첼, 2022: 97).
2.
치매인 서사가 제안하는 치매 정책의 새로운 방향
앞 절은 ‘타자’에 의해 구성된 치매 정책을 ‘치매인 당사자의 욕구’에 근거한 정책으로 전환하기 위한 기저 작업으로 치매인의 자서전을 9개의 서사 항목을 중심으로 분석한 것이다. 이를 통해 치매인은 치매 전조⋅치매 진단⋅치매인의 삶으로 전환에 어떻게 적응하고 대처하며 그 과정에서 새롭게 체득한 삶의 기술은 무엇인가를 이해한다. 나아가 치매와 더불어 사는 삶에서 불안⋅편견⋅차별⋅고립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며, 자신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들여다본다. 이 절에서는 치매인의 ‘자서전 서사 분석’에서 확인한 욕구와 삶의 바람에 내재한 ‘프랙털(Fractal)’ 구조를 세 가지 층위로 나누어 확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치매인 개개인이 자신의 경험을 다시 돌아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이야기로 구성한 서사는 단순한 개별적 생명 활동의 언술에 머물지 않고 사람다움을 지키고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려는 온 생명의 공통적 본질 지향을 담고 있음을 말한다.
1)
치매 자각 및 진단 경험의 서사가 말하는 치매인의 욕구
치매는 다른 질환에 비해 스스로 증세를 자각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치매인 서사 분석은 치매인 스스로가 운전하기, 이름 기억하기 등 자신의 일상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이상 징후를 체험하고 알아채는 주체임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자연스러운 일들이 점차 수행하기 어렵게 된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 이 시기가 어떤 의미에서는 치매인에게 가장 괴롭고 고독한 시간일 수 있음을 정책 설정에서 헤아릴 필요가 크다고 본다(나가오 가즈히로, 2017: 37).
치매를 자각하고 치매 진단을 받으면 치매인은 무엇보다 자신이 가치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까 두려워 진단 결과를 가족이나 주위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또한 치매 진단 과정이 지나치게 임상의학 입장에서만 진행되기에 당사자로서 치매인은 사리분별 어려운 사람으로 간주되고 의사나 가족이 그의 앞날을 전적으로 결정해 버린다. 더욱이 치매인은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아 치매 진단을 받은 당사자의 기분은 어떤지 묻는 사람은 없고 관심은 오직 치매라는 질병뿐이다(웬디 미첼, 2022: 186). 그에 따라 치매인의 지난 삶의 이력과 인격은 증발되고 고유한 서사를 상실한다. 그렇지만 서사 분석에 따르면 치매인은 진단 과정에서 자신의 치매 증상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진행하며, 치매에 걸려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자신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병원은 어느 병원이며. 삶의 질은 얼마나 나빠질 것인지와 같은 앞으로 자신의 삶과 연관한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 자상한 설명을 바란다는 것을 알려준다.
2)
치매 진단 이후 치매인의 불안한 삶의 경험과 생존 서사가 말하는 치매인의 욕구
치매 진단 이후 치매인은 자신의 상태를 어떻게 판단하며, 치매로 인한 삶의 고뇌나 불안은 무엇이고, 치매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마련하는 생존 전략은 어떤 것이며, 삶의 지속과 안정을 위해 꼭 채워지길 바라는 중요한 욕구는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먼저, 치매인 서사 분석은 치매인이 자신의 치매 상태를 인식하고 수용하며 반응하는 주요한 경향을 알 수 있게 한다. 치매인은 기억력의 약화. 시간⋅공간 감각 쇠퇴 등으로 수행해야 할 일상사 처리에 시간이 걸리고, 상호작용 과정에서 어떤 말로 반응하고 대응해야 할지 몰라 멍해지거나 좌절한다. 그래서 점차 신경과민이 되거나 직선적 성격으로 감정 변화를 보인다는 점을 가르쳐준다. 그런데 치매 진단을 받았더라도 인지력 저하는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치매인은 갑자기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온조 아야코 2022: 6-8). 또한 기억이나 인식 등에 문제를 지니게 되지만 행복⋅슬픔⋅분노⋅좌절⋅만족 등 보편적 감정을 가지고 삶의 상황 변화를 인식할 수 있다(웬디 미첼, 2022: 183-185). 그래서 치매인이 의욕을 되살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삶을 체념하지 않고 활동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돌봄의 출발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치매인 서사 분석은 치매인이 지닌 삶의 고뇌⋅불안⋅공포의 연원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치매인은 자신의 치매 증상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다. 치매의 진행 양상은 예측하고 제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공포로 느끼는 것이다. 그에 따라 치매 증상이 더 나빠지더라도 가족은 자신을 보호하고 돌보아 줄 것인지 아니면 인간 폐품 취급 할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가족이나 상호작용 대상자가 이해와 배려보다는 무시와 편견에 찬 험담과 비웃음이 일상 반복되는 데서 느끼는 슬픔과 고통의 감정으로 치매인은 우울증에 빠지거나 폭력적 성향으로 대응한다. 달리 말해 치매인은 자신과 세계를 연결하는 인지능력이 저하됨에 따라 인지기능을 사용해야 할 때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그 불안과 공포는 쉽게 화를 내는 감정 표출로 나타나거나 허구 현실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그 근본에 있는 심리적 다이너미즘은 세계와 연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자기방어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온조 아야코, 2022:207). 이런 점에서 보면 치매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부여해서 역할 지속을 체감하도록 하고, 실수하는 일이 늘어도 인간적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 치매인 스스로 존재 의미를 보존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어서, 치매인 서사 분석은 삶의 불안과 공포를 넘어서기 위해 치매 당사자는 어떤 생존 전략을 마련하는지를 알려준다. 치매인의 생존 전략 유형을 단순화하면 ‘자기 유지’와 ‘자기 순응’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웬디 미첼, 2022: 223-224). 자기 유지 전략은 자신이 치매에 걸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인지기능의 쇠퇴를 감추거나 무시하는 것인데, 자신의 치매가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극단적으로 사람을 피하거나 선택해서 만나는 것이 전형적 현상이다. 자기 순응 전략은 인지능력 상실의 상황에 그럴듯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으로 엉뚱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도록 천천히 이야기하거나 의사소통이 의도와 다른 쪽으로 흘러갈 때 적당히 얼버무리는 등 겉모습 꾸미기를 하는 것을 이른다. 이처럼 치매인의 일상 행위는 타인이 봤을 때는 언뜻 이상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삶의 불안과 공포를 넘어서 생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한 생존 전략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치매인은 인지 능력 손상의 한편에 잔존하는 감정 능력을 활용해서 자기 나름 삶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 상황에 필사적으로 맞대응하며, 증상이 바뀌면 새로운 적응 전략을 마련하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존재이다(온조 아야코, 2022: 140-141). 나아가 일부 치매인은 혼자 생활하면 재촉하거나 비참하게 하는 사람이 없고, 자기 삶의 속도에 맞추어 판단⋅선택⋅결정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독립생활을 생존 전략으로 선택하는 것도 눈여겨 볼만한 욕구이다(웬디 미첼, 2022: 80-82).
나아가 치매인 서사 분석은 치매 당사자가 자신의 삶의 지속과 안정을 위해 가장 긴요하게 바라는 욕구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치매인은 앞으로 자신의 증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지지해 주고 돌보아 줄 사람을 가장 바란다. 치매인이 살아있음을 충분히 공감하면서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주는 존재와 그 사람의 지지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치매 당사자는 자신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 존재로 여겨 자신의 모든 역할을 빼앗지 않기를 바라며, 비록 치매 상태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삶과 연관한 일을 결정할 때는 당사자를 빼놓지 않기를 희망한다. 요컨대 치매인은 자신도 치매 이전처럼 늘 가족, 이웃, 사회적 삶에서 대등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나가오 가즈히로, 2017: 158). 그리고 불안과 고뇌에 찬 삶을 살면서도 자신이 낙담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버티는 데 종교 신앙이 큰 역할을 함을 말한다.
3)
치매인 서사가 말하는 치매인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구성에 대한 욕구
치매 당사자는 삶의 불안과 고립을 넘어 안정된 삶을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사람들의 관계나 사회 형식이 어떻게 꾸려져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알아보자.
우선 치매인은 자신의 안정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생활환경을 바라는 것일까. 치매인 서사 분석은 가족, 의료, 돌봄 서비스 제공자가 애정과 지지의 태도로 치매인의 상태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해 주길 바란다는 것을 보여준다. 치매 당사자를 모자란 사람으로 여기고 의무감에서만 돌보거나 인격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보살피는 것은 치매인을 삶에서 배제하는 것이자 돌봄의 본질적 의미를 내다 버린 것이다. 치매 당사자는 가족이나 사회적 돌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관심을 쏟으면 그의 삶이 훨씬 희망에 찰 것이라고 느낀다.
치매 증상은 일반적으로 인지능력 저하인 ‘중심 증상’과 치매로 인해 자신을 둘러싼 생활환경 부적응에 따른 폭력, 배회, 망상 등의 ‘주변 증상’으로 나눈다. 주변 증상이 발현하지 않은 채 인지능력, 기억력, 시간과 공간 감각력, 의사소통 능력의 저하만을 보이는 ‘순수 치매’는 무엇보다 치매인이 안심할 수 있는 생활환경을 마련하여 지속적으로 제공하는가 여부에 달린 것이다(오이 겐, 2013: 46-50). 치매인을 수용하고 존중하는 생활환경은 치매인의 안정감과 자존감을 높여서 주변 증상 발현을 낮추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치매 의료와 치매인 돌봄의 초점은 되돌릴 수 없는 인지능력 치료나 약물 관리가 아니다. 그보다는 치매인의 인간 실존의 인정과 인격 존중을 통해 안정된 삶을 체감하도록 하여 주변 증상을 완화하거나 발현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치매인의 인간성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것은 치매인이 살아온 인생 역정, 곧 치매인의 서사를 잘 이해하고 그에 충분히 감응하는 것에서 생겨난다. 전문 의료인과 돌봄 서비스 제공자가 치매인의 서사를 상세히 아는 것은 치매인 치료와 돌봄 계획 수립에서 필수적 요소이다. 그들이 치매인의 서사를 공유하고 이야기에 공감하며 삶의 이력을 깊게 이해할수록 치매인에 대한 수용과 존중의 태도는 강화되며, 치매인의 생활 지원에 유용한 구체적 정보를 공유하게 된다(웬디 미첼, 2022: 240-242). 그 결과 치료와 돌봄 계획이 큰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점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치매인 서사 분석은 치매인의 삶의 지속에 힘이 될 사회적 관계나 지역사회 시스템의 내용과 형식은 어떠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치매인이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의료와 돌봄 서비스 외에도 치매인에 적합한 주거, 교통수단, 소비자 피해 방지, 금전 관리와 재산보호, 편견과 차별 해소의 인권 옹호 등 다양한 차원에 걸쳐 있다. 치매인의 이런 욕구에 맞추어 지역사회 내 돌봄 서비스도 재정비 되어야 한다. 단순한 보살핌에서 역할 부여와 자립 지원으로, 집단 돌봄에서 개별 돌봄으로, 선별적 지원에서 포괄적이고 복합적인 욕구 실현으로 확대해야 한다. 아울러 지역사회의 은행, 슈퍼마켓, 우체국, 보험회사, 행정 관청, 경찰서, 소방서, 학교, 사회복지관 등 지역의 모든 생활자원에 치매인이 평이하게 접근해서 지속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운영 방식이 조정되고 상호 연계를 꾀해야 한다. 심지어 배회해도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는 지역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나가오 가즈히로, 2017: 219).
한편, 치매인의 지역사회 내 거주 방식의 새로운 경향으로 가족의 돌봄 없이 치매인 혼자 생활을 꾸려가는 독립생활 욕구에 다시 주목한다. 치매인의 독립생활은 가족의 간섭 없이 자기 삶의 리듬 확보라는 동기 말고도 요양원과 같은 시설 보호에 대한 커다란 거부감을 배경으로 한다. 치매인은 대개 자신의 집에 무서울 정도로 집착한다(우에노 지즈코, 2016: 213). 치매 당사자는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 요양시설 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은지 하는 자신의 서사가 사라지는 그 자체와 동일시한다. 치매인의 서사 상실은 그 반대편에 성별, 연령, 돌봄의 난이도로만 기록되어 관리되는 사람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나가오 가즈히로, 2017: 175).
그런데 치매인의 독립생활은 장점도 많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상호작용 할 사람이 주위에 없어 외로움을 가져오기 때문에 관계성에 대한 욕구도 동시에 내장하고 있다. 그래서 독립생활을 하면서도 지역사회 구성원과 연결되어 사는 삶의 방식으로서 비슷한 처지의 치매인끼리 자조 집단을 만든다. 자조집단 구성원과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일상생활의 고충을 푸는 데 도움이 되는 삶의 경험이나 지혜를 공유하도록 하는 지원을 하는 것이다(우에노 치즈코, 2016: 226). 치매인의 사람 사이 연결 지원과 더불어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 공식, 비공식 활동에 참여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지원 역시 사회적 존재로서 치매인의 욕구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지역사회 활동을 통해 치매 당사자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선보이게 하거나, 자신의 두려움과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많이 만들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삶의 질도 함께 향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웬디 미첼, 2022: 249). 요컨대 치매인이 가족과 함께 살든, 혼자 독립생활을 하든 이웃 사람과 지역사회 그리고 소요할 자연 공간과 연결 관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치매 당사자의 욕구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 정책 디자인의 기반이다.
Ⅴ.
맺음말
이 글은 치매 관련 연구, 정책⋅제도, 서비스 마련의 실천 구상이 인간 존재에 대한 진정성과 삶의 실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치매 당사자의 욕구에 근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다음 연구 주제를 불러낸다. 우선, 치매인은 치매 전조⋅치매 진단⋅치매인의 삶으로 전환에 어떻게 적응하고 대처하며 그 과정에서 새롭게 체득한 삶의 기술은 무엇인가를 이해한다. 다음으로, 치매와 더불어 사는 삶에서 불안⋅편견⋅차별⋅고립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며, 자신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들여다본다. 치매 당사자의 주관적 경험과 내면의 감정에 담긴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내러티브 분석, 그 가운데서도 ‘치매인 자서전의 서사 분석’을 활용한다.
분석을 통해 고립과 배제를 넘어 연결된 존재를 갈망하는 치매인의 주요한 욕구와 그 실현을 위한 치매 정책의 새로운 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치매인이 증상을 자각하기 시작한 시점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괴롭고 고독한 시기일 수 있다는 것을 치매 정책 설정은 헤아릴 필요가 크다. 둘째, 치매인은 치매 진단 이후 삶과 연관한 구체적인 설명과 정보 제공을 원한다. 치매를 발견하고 진단하는 의료서비스가 담아야 정책의 주요한 내용이자 방향이다. 셋째, 치매의 인지력 저하는 서서히 진행하기에 돌봄 정책 구상의 기본 골격은 치매인이 의욕을 되살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삶을 체념하지 않고 활동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넷째, 치매인은 자신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주는 존재와 지지를 원하면서도 자신의 삶과 연관한 일을 결정할 때는 당사자를 빼놓지 않아야 함을 희망한다. 삶의 욕구 실현을 위해 타인에게 의존한다는 것과 자기 결정권이 없다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기에 치매인의 사회적 포용과 자기 결정권 행사를 옹호하는 정책 마련이 중요하다. 다섯째, 치매 의료와 돌봄의 초점은 되돌릴 수 없는 인지능력 치료나 약물 관리가 아니다. 그보다는 치매인의 인간 실존의 인정과 인격 존중을 통해 안정된 삶을 체감하도록 하여 주변 증상을 완화하거나 발현하지 않도록 하는 실천의 방향 전환을 요구한다. 치매인의 인간성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것은 그의 인생 역정 곧 치매인의 서사를 잘 이해하고 충분히 감응하는 데서 생겨난다. 이런 점에서 치매 치료와 돌봄 정책 수립의 중심축은 치매인과 의료 전문가⋅돌봄 서비스 인력 사이에 공감과 지지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틀을 구축하는 것이다. 여섯째, 치매인이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 공식⋅비공식 활동에 참여해서 사회적 존재로서 욕구 실현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정상화와 사회통합의 가치를 구현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활동이다. 지역사회 활동을 통해 치매 당사자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선보이게 하거나, 자신의 두려움과 배제 감정을 표출할 기회를 많이 만들수록 자존감이 높아지고 삶의 질도 향상될 것이다. 곧 치매인의 이웃 사람⋅지역사회 생활자원⋅소요하는 자연 공간과 연결 관계를 이어가려고 하는 욕구에 대한 천착과 옹호를 정책 설정의 좌표축으로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치매인의 삶의 상태와 연관해 중요한 논의 주제이지만 치매 당사자의 욕구 분석이라는 이 글의 제한성으로 인해 ‘치매의 조기 발견⋅조기 개입’이라는 정책 슬로건의 과잉 발신 문제를 다루지 못했다. 여기서 간략히 그 언술이 덮어 가리고 있는 의미를 몇 가지 드러낸 후에 글의 마지막 서술로 옮겨가기로 한다.
널리 알듯이 현재 의학이나 약학 수준에서 치매는 그 진행을 다소 완화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치유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치매 증상을 멈추거나 늦춘다는 약의 효과도 한정적이고, 치매예방 의료 효과도 실증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약은 환자의 5%-10%에서 치매의 진행을 2.7% 정도 늦춘다. 그마저 효과가 약 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한정된다. 그래서 프랑스의 보건의료 담당 부서는 치매 약의 효과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2018년 8월부터 건강보험 적용을 하지 않는다(온조 아야코, 2022: 48-51).
이런 상황에서 ‘치매의 조기 발견⋅조기 개입’이라는 정책의 과도한 실행은 오히려 치매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를 불러일으켜 치매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배제⋅고립을 강화하는 진앙지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조기 발견⋅조기 개입을 강조하는 치매 전문가는 빠른 의료 개입은 본인이나 가족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하며, 치매와 더불어 살 수 있는 환경을 정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실제 치매 조기 발견과 진단 후 의료인이 지역사회의 정신보건사회복지사, 간호사, 임상심리사, 작업치료사 등의 돌봄 서비스 전문가와 팀을 이루어 치매인을 지원하는 사례는 드물다. 조기 진단 후 의사는 거의 약물 처방 치료를 실행할 뿐이다. 노화의 특별한 경로인 치매는 이처럼 노인정신의학에 편입되면서 병리적 증상이 되어 약물 중심 의료에 구속되고, 의료 전문가 역시 의료 상업화에 조종되어 의료 본래의 방향을 상실한다(北中淳子 外, 2016: 136-138). 결국 ‘치매의 조기 발견⋅조기 개입’ 담론은 치매의 의료 편입을 정당화하면서 치매 의료의 상업화와 독점적 이윤 확보를 보장하는 정책의 이념적 슬로건 역할이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담론을 구성해서 작동하는 세 주체는 제약회사 자본, 의학계(병원자본), 국가이다. 제약회사는 치매 연구를 하는 의학계에 엄청난 재정 지원을 하며, 제약회사에 불리한 연구 결과는 전문 학술지에 싣지 않거나 설령 싣는다고 해도 결과를 순화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보건의료 정책을 수립하는 관료는 치매의 무력감과 절망감을 부각하면서 치매 약물 치료가 주는 사회적⋅경제적 효과라는 환상을 내던짐으로써 치매인과 그 가족으로 하여금 약효의 실효와 상관없이 삼각 동맹의 의도에 따르도록 부추긴다(휘프 바위선, 2022: 52-55).
그렇기에 치매를 조기 발견해서 조기 치료한다는 담론보다는 치매에 걸려도 안심하고 안정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사회형식을 만들어 가는 것을 치매 정책의 기조로 삼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위에서 말한 치매 정책의 전환은 정책 디자인을 치매 당사자의 욕구에 부합하도록 함으로써 치매인이 하고 싶은 일을 실현하도록 하고, 사회적 역할을 획득하며, 타자 및 자연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정책의 가시적 성취에 대한 기대 그 자체이기도 하다. 치매 정책의 결실을 향한 노정에서 효과를 키울 수 있는 매개적 실천 활동의 밑그림 두 가지를 소묘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공동 의사결정(Shared Decision Making)’과 ‘공동 창조(Co-production)’이다(齋藤環 外, 2021: 182-193). ‘공동 의사결정’은 치매 당사자와 의료⋅돌봄 서비스 제공자의 상호작용이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 되도록 하는 정책 실천의 매개 활동이다. 치매인과 의료⋅돌봄 서비스 제공자가 서비스를 지원하는 목적, 기대하는 사항에 대해 함께 의견을 교환하고 필요한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치매인의 욕구를 반영하는 서비스 모델을 도출하는 상호작용 프로세스이다. 공동 의사결정은 치매인의 서비스 만족도, 생활의 질, 약물 처방과 치료에 관한 정보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공동 창조’는 치매 관련 복지⋅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당사자가 자신이 이용하는 혹은 이용하려고 하는 서비스를 설계⋅기획⋅실행하는 시스템에 참여해서 전문가와 동등한 권한 행사를 통해 정책 수립과 서비스 실행 과정을 통제하는 것을 말한다. 공동 창조 활동은 앞의 공동 의사결정보다 권한을 행사하고 통제하는 수준이 높아 치매 당사자는 단순한 정보 공유 대상으로부터 치매 정책의 입안, 기획, 정책 제도화, 서비스 전달 및 실천, 평가 과정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치매 정책과 서비스 실행에서 공동 창조에 대한 관심은 의료나 돌봄 서비스 전문가 집단이 행사하는 일방적 권력성에 대한 당사자 제어의 필요성에서 제기된 것이다. 전문가만이 치매인의 삶에 도움이 되는 최선의 방법을 알고 있다는 사회적 신화는 의료 편향적 틀을 통해 치매인의 행동을 제약하거나 일상을 구속하는 것마저도 용인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한편, 치매 당사사가 공동 창조 활동에서 실질적인 권한과 통제력을 행사하는 데는 자신들의 경험을 사회적 욕구로 재구성하고 정책⋅제도화의 정당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역량 발휘를 필요로 한다. 치매인의 자조집단은 치매의 개별적 경험을 체계적인 욕구로 엮어서 정책 형성의 바탕이 되는 정보로 가공하는 집단 지성의 조직이자 삶의 든든한 진지의 하나이다. 자조집단의 조직적 활동은 치매 당사자의 권리 실현 운동으로 이어지고, 이는 치매 의료나 돌봄의 전문 지식 ‘밖에서’ 당사자가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 갈 정책, 제도, 서비스를 창출하는 새로운 서사이다.
오세근
은 전남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히로시마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관심 분야는 사회문제, 동양사회 사상, 사회복지 사상 등이다. 저서로 한국 전통사상의 사회학적 도전(2022, 공저), 현대사회의 위기와 동양사회사상(2016, 공저) 등이 있다. 최근 논문으로는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COVID-19)의 팬데믹 경험 분석을 위한 이론적 시각 제안(2023)」, 「정신장애인복지의 패러다임 전환으로서 당사자주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함의와 사상적 체계화의 방향 설정을 중심으로(2022)」, 「민주주의와 인권 발현의 역사적 ‘프락시스(praxis)’로서 혁명 과정의 이론적 재구성 : ‘프랑스 혁명’과 ‘동학 혁명’의 역사적 경험을 중심으로(2020)」 등이 있다.
이명호
는 한양대에서 사회학, 동신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양대 등에서 강의하였고, 경희대 종교시민문화연구소에서 학술연구교수로 활동하였다. 현재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산하 인드라망연구소에서 생태문명(생명평화)과 문명전환, 생태마을, 마을공동체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종교 거버넌스와 종교영성』(2024, 공저), 『문명전환과 불교의 응답』(2022), 『노년의 편안한 임종을 관찰하다』(2021), 『현대사회의 위기와 동양사회사상』, (2014, 공저)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Assessing the Efficacy of Medical and Cultural Support for Immigrant Adaptation and Social Integration(2024, 공저), 기후정치의 실패와 생태시민성: 토마스 베리의 인간 재창조를 중심으로(2024), 복합위기 시기, 불교의 사유에 근거한 생태적 돌봄 전망하기(2023), 생태위기 극복을 위한 종교 기반 협력적 거버넌스에 관한 탐색적 연구(2022), 코로나19 이전/이후, 사회의 재구조화 가능성(2021), 공감의 구조변동, 관계지향적 삶의 실천으로(2017) 등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